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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道 쌓아올린 길: 돌탑
 

인성리와 무릉리 방사탑에 대한 의미, 그 장소성에 대한 소고小考

Office Tul  ​ 

“이 섬의 사람들은 엑센 바위 위에서 살아왔다. 바위표면을 살짝 덮은 흙, 그것이 생명이었다. 그것이 제주사람들을 먹여 살려온 것이다.”  - 탐라기행 1986, Ryotaro Shiba

 

건축(물)과 그 원형: 제주문화

항상 그렇지만 제주에서의 현무암은 제주석이라 불릴 만큼 지역의 정체성을 갖는 자연재료이자 문화 그 자체이다. 물론 자연재료로서 현무암이 문화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원론적의미로서 문화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어떤 것이라는 의미처럼 현무암이 ‘제주석’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며, 어떤 인공성이 가미되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 결과물중 하나가 건축 혹은 건축물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사회가 갖는 문화적, 경제적 결과의 총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떠하였을까? 라고 언젠가 막연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즉 시초의 건축, 천연동굴에서 나와 혹독한 자연으로부터 보호되어지기 위한 인공물의 시작점. 나는 언젠가는  그 시작점이 바람에 날리던 천 혹은 직물 같은 어떤 것이었기를 바라는 낭만적 생각을 품기도 했었다. 사실이 중요하지는 않은 법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때즘 언젠가는 머들, 혹은 벡케라 불리는 제주 돌무더기들에 대해 알게 된 순간 건축(물)의 시초는 무엇이었을까 반추했던 생각과 겹치는 지점들이 있었다. 밭의 돌을 고라 일용할 식량을 얻어야했던 간절했던 순간들, 그 돌들을 하나하나 골라내고 던져내고 들어내어 파종을 하고 수확했던 순간들, 수확물을 조리해 도란도란 밥을 먹던 순간들, 올해가 아니면 내년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 그 순간들 말이다. 자연스럽게 돌무더기들은 사유재산으로서 대지, 즉 밭의 경계를 짓는 순기능 또한 갖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 순간 마을 사람들의 돌무더기는 좀 더 인공성이 가미된 밭담으로 서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인원도 나뉘어져 인간이라는 호모종이 뻗어나왔듯, 밭담 혹은 쌓는다는 행위에서 나뉘어져 제주건축(물)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과정의 곁가지들은 산담, 원담등으로, 아니면 외담, 겹담등으로도 나뉘어갔을 것이며, 또한 마을공동 연자방앗간의 연자매(맷돌)가 그것일 수도 있다. 돌담의 범위를 넘어선 변형중 하나는 또한 우리가 흔히 방사탑이라는 부르는 돌탑일 것이다.

 

거욱(대)와 방사탑

거욱 혹은 거욱대는 방사탑을 이르는 제주말이라 한다. 제주출신인 내게도 이단어는 좀 낯설었다. 내가 제주 돌문화 전문가는 아니지만 거욱 보다는 오히려 방사탑이 덜 낯선데 그것은 내가 들은 탑은 책이나 교과서에서 읽고 미디어를 통해 들은 탓 때문이라 생각된다. 알고보니 방사탑이라는 용어는 제주 어느 마을에서도 사용한 적이 없는 용어라고 한다. 학문적 용어라는 말이다. 하나의 용어가 필요했던 것은 하나의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거욱 혹은 거욱대 또한 제주전역에서 방사탑을 의미하는 공통어는 아니었으며, 답, 탑, 혹은 답대, 답동산, 까막동산, 걱대, 솔대왓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불렸다고 한다. 답(탑)이나 거욱이 다소 많은 마을에서 사용되기는 했다고 하지만  바로 옆 마을에서는 전혀 다른 명칭이 사용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그 돌탑의 형태나 방식은 대체로는 원형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끝이 잘려나간 원뿔형을 띈다는 점이다. 어느 마을이나 같다. 현무암이라는 재료를 쌓기에 가장 원초적 형태가 원뿔이라는 뜻이다. 이는 물리법칙 혹은 재료의 물성은 보편성을 띄는 반면 사람의 본성은 사뭇 달라 동일한 형태 혹은 성질에 대해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방사탑의 의미는 대체로는 사邪한 기운을 막는다防는 의미로 전해지지만 마을마다 그 방식이나 목적은 좀 다른방식을 띄기도 한다. 대체로 내 머릿속 방사탑이라 하면 먼저 바다를 배경으로 홀로 서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아니면 마을 어귀 혹은 밭담들 너머 마을 퐁낭처럼 홀로 우뚝 서 있는 그런 모습일진데 내가 찾은 서귀포 어느 마을들의 돌탑(들)은 바다를 배경으로도 홀로 서있지도 않았다.  

 

인성리와 무릉리의 돌탑들

방사탑이 독립된 탑의 형을 갖는 것이 보편적일까? 내가 짐작컨대 근대 이후에 지어진 4.3해원방사탑등을 보면 유독 더 높고 크며 독립형의 탑으로 지어진 듯하다. 눈에 확 띄어 상징성과 기념비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런데 내가 들른 서귀포 여느 마을의 거욱들은 한 번에 배치를 고려해 지었는지 한기씩 늘려나간 결과물인지는 모르지만 2기 이상 혹은 4기정도의 탑들이 짧게는 십여미터에서 길게는 백여미터 내외로 모여 있었다. 인성리와 무릉리의 거욱들이 그러했다.

[사진 1] 경작지 너머 단산을 배경으로하는 인성리 방사탑 1, 2호 모습 ⓒShon Jongnam

[사진 1] 경작지 너머 단산을 배경으로하는 인성리 방사탑 1, 2호 모습 ⓒShon Jongnam

 

인성리 방사탑은 4기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2개의 탑만 남아있다. 한국전쟁당시 2기의 탑을 헐어 모슬포훈련소를 만들었다하는데 설에 따르면 4기 탑을 모두 헐었으나 이후 마을에 소가 죽는등 액이 끼였다하여 마을주민마다 쌀 한되씩을 모아 현재의 탑을 다시 세웠다 전해진다. 2호 방사탑의 경우 밭주인이 불편하다하여 옮겼다고도 하나 현재와 비슷한 거리를 두고 세웠다치면 다른 두 개의 탑의 위치도 여는 농경지 한가운데였을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탑은 단산(簞山:바굼지(박쥐)오름)에서 서측으로 4백여미터 떨어져 있었다. 농로를 따라 탑쪽으로 걷는데 내가 방문한날은 바람이 유독 센 날이어서 그런지 너른 ‘알뱅디’ 평지가 유독 더 넓게 느껴졌다. 방사탑은 농로에서 벗어나 백여미터 밭담을 따라 들어가야 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단산의 모습이 눈에 띈다. 너른 평지의 허(虛)함을 막기 위해 혹은 단산의 기괴한 모습에서 흉(凶)함을 막기 위해 탑 4기를 세웠다 하는데, 단산의 모습이 기괴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땅에서 눈에 띄는 풍경은 맞는듯했다. 탑 1호 또한 새로 쌓았다하여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다고 하나 최소 2미터는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백여미터 떨어진 곳에 2호탑이 보였으나 밭을 가로질러 갈만큼 밭담이 고르지 못해 밭담을 다시 돌아나와 왔던 농로를 따라 돌아가야 했는데 사실 또 다른 밭을 다시 가로질러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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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970년대(좌)와 현재(우) 인성리 방사탑과 단산 근처 지장물 밀도변화

​2호 방사탑에서는 단산의 모습이 더욱 잘 보였다. 탑의 크기나 형태뿐만 아니라 농경지 한가운데 있는 점 또한 1호탑과 동일했다. 다시 콘크리트로 포장된 농로로 나와 잔뜩묻은 신발의 진창흙을 털어내며 든 생각은 너른 평지위에 잘 보이게 놓인 두 개의 돌탑이라는 사실이었다. 탑의 위치는 너른 평지 한가운데 어느쯤이며 게다가 너른 밭의 한가운데 놓여있다. ‘잘 보여지기’ 위해 접근성은 내려놓았고 ‘잘 보여짐’으로서 사방어디에서든 단산과의 사이에 1기이상의 탑이 놓이게 된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리고 단산 근처에는 70년대까지만해도 흉하다 하여 여는 지장물이나 건축물도 있지 않았으니 4기의 탑들너머 단산의 모습, 단산과 탑이 중첩된 풍경은 근대화이전 수백년간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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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무릉리 방사탑 위치도(1979)

 

이와 달리 무릉리의 탑들은 구부정한 길(올레)을 따라 10여미터 간격으로 인접해 세워져 있다. 각각의 거욱들은 농지의 밭담과 구분이 없었으며 탑들 경계너머는 ‘마을 밖’으로 보여지며 길안쪽, 즉 탑들 동측은 ‘마을 안’으로 보여질법했다. 그리고 무릉리 거욱들의 독특한 점은 돌담 위 혹은 돌담의 일부처럼 세워지기도 했으나 이돌담은 잣담옹벽들 위에 놓여 일종의 ‘축담’역할까지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을안’과 ‘마을 밖’은 1.5미터내외의 레벨차이가 있었다. 논짓물로도 유명한 무릉리라 그런지 낮은 쪽에 물이 차기도하고 습해 실제로 그것을 막고, 또한 심리적으로 막기 위해 축담 위 돌담과 거욱 4기를 연속적으로 지은 것은 자명해 보인다. 실제 이 담과 탑을 관리하고 촉각적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올레길이 난 것이란 생각도 든다. 길을 따라 탑을 세웠다기보다 탑을 쌓고 길이 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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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마을 밖’에서 바라본 4개의 방사탑 모습 ⓒShon Jongnam

​현재 무릉리 탑주변은 마을안밖의 경계로서 4기의 탑들이 품어내는 장소성은 어느 정도 유지되어보였으나 한발 물러서보면 일주서로의 압도적 스케일 때문인지 거욱들이 보여줬을 법한 탑들너머 마을을 품어내는 아우라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돌탑들이 늘어선 길은 크게 변형되지 않고 유지되어 걷고 탑에 다가서고 멀어질 때의 공간스케일과 대지 위 장소성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다가설수 있고 곁에두며, 기능이 부여된 탑들. 이는 인성리의 돌무더기들, 그 탑들이 만든 장소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현무암과 제주석의 문화: 마을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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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무릉리방사탑 2호 입면스케치: 담과 탑의 구분이 없다 ⓒShon Jongnam

 

무릉리 방사탑2호는 담이 탑이 되었고 이 탑은 마치 이제 집이 되고자하는 듯하다.  의인화된 인공물처럼 살아있다. 여느 마을에 있는 동일한 재료와 형이지만 전혀 다른 장소성을 품어낸다. 이는 재료와 모양뿐만이 아닌 규모에 있어서도 유사한 인공물이 옆 마을에서는 전혀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이는 제주도라는 큰 범위에서의 전통이 있으면서도 제주는 각 마을마다 고유의 정체성을 확연히 갖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인성리 마을에서는 사라진 방사탑을 마을 주민들이 쌀 한되씩을 추려 다시 세웠다했는데 실제 마을의 탑들은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만들어져 개인의 문제가 아닌 마을공동체의 문제로 받아들어졌다. 

 

탑을 쌓는 일이 날짜를 정해 마을공동어장의 미역을 캐는 미역해경이나, 성이나 성벽을 쌓는 출력出力만큼 생존에 직결될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친 제주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지혜롭게 살아가고자한 주민들에게 있어 직접 다듬어 쌓고 올려, 의미를 품어낸 인공물은 외적을 막는 성벽 이상의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쌓아올린 현무암은 ‘제주석’이 이미 되어 갔을 것이며 이렇게 하나의 문화가 만들어져 왔고 만들어져 간다.  

*본에세이는 2024서귀포건축문화연구회 백서를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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